최문형 교수

우리의 몸과 맘을 사정없이 달궈댔던 여름이 훌쩍 떠나고 가을이 왔다. 사계절을 가진 땅에 사는 사람들은 변화를 즐길 권리도 있다.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들과 색깔이 변한 이파리들이 있지 않은가? 자연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려고 산으로, 공원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바쁘다.
‘아, 이 가을이 가고 나면 한 해가 가고 또 나이를 먹게 되는구나!’
‘세월을 돌려다오~’ 이런 가사도 있고 ‘내 나이가 어때서?’ 이런 노래도 있고….
상념에 젖어 걸어가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니 청춘 같던 푸른 잎은 울긋불긋 색이 바랬고 서러워 아래를 내려다보니 바사삭 구르는 건 또 낙엽이다. 이파리의 죽음! 누가 나이 먹음을 아름답다고 했는가?
옛사람들이 ‘서리 물든 단풍잎, 봄꽃보다 더 붉다’고 칭찬해 주었건만 장년과 노년들은 그저 화사한 꽃과 푸른 이파리가 부러울 뿐이다. 그래서 자기감정을 친절하게도 나무에게 이입해준다.
‘불쌍한 이파리들! 너도 서럽지? 땅에 구르는 신세가 슬프지? 너랑 나랑 아픔을 함께 나누자꾸나!’
얼마 전까지 나도 그랬다. 공교롭게도 낙엽의 계절은 연말과 닿아있으니 그 쓸쓸함을 더 말해 무엇하랴!
그래서 나무한테 말을 좀 걸어보았다.
“저기, 나무 양반! 기분이 어때요? 1년을 함께 했던 자식 같은 이파리들을 떨어버리려니 인생, 아니, 나무생도 무상하고 뭐 그렇지 않아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나의 일꾼, 이파리들은 내내 지금의 이 순간만 기다렸는데 말이요. 나 또한 이 가을이 가장 뿌듯한 계절이고 그들도 그렇다오”
나무가 정색을 하고 팔을 휘휘 내저었다.
“우리 인간들은 이파리들의 죽음을 이리도 슬퍼하는데 당신은 참으로 무정도 하구려” 내가 발길을 돌리려는데 나무가 돌려세웠다.
“거, 참, 성질도 급하네. 내 말 좀 들어봐요. 나의 맏자식인 이파리들은 새 봄부터 열일해서 꽃을 피웠지, 꽃들이 혼인하고 나면 봉우리 같은 작은 열매를 키웠지. 우린 뜨거운 여름 날, 비 오는 날에도 쉬지 않고 일했어. 때로는 형제자매들이 뜯기거나 무참히 떨어져도 서로 보듬으면서 말이야. 그저 열매들을 키울 생각밖에 없었던 거지. 그런데 이제 가을이 되어 열매들이 잘 자라서 먼 곳으로 떠나 독립하고 나니 드디어 쉴 시간이 된 거야. 드디어 휴가가 온 거지. 내 말 못 알아듣겠소?”
“아하, 그게 그런 거구나. 듣고 보니 그럴 법도 하네요.”
“그래서 나의 이파리들은 빨갛고 노란, 화려한 드레스로 갈아입고 세상을 향해 외친다오. ‘자, 나를 보세요!, 우리를 보세요! 우리의 자랑스러운 열매와 씨앗들을! 그리고 축하해주오, 우리의 노고를! 우리의 한 해를! 우리는 이제 땅으로 돌아가 다음 세대의 거름이 되려 한다오!’ 이렇게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내가 어안이 벙벙해진 사이, 나무는 옆의 나무랑 그들만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단풍을 다시 보게 됐다. 가수 패티김이 백발의 모습으로 은퇴식을 할 때 입었던 그화려한 드레스가 떠올랐다.
그래서 고운 단풍을 보면 나도 이제 환호를 보낸다.
“정말 수고 많았어요! 당신 최고!”
구르는 낙엽에게도 경의를 표한다.
“이제 다른 세상 구경도 하면서 바람 따라 여행도 다니고 쉬기도 하구려. 인간들에겐 관심 갖지 말고요. 이 멍청한 이들에게는 뭐 가르치려 할 거 없다오!”
최문형(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초빙교수, 고전학교 문인헌 교수) ◆ 약력 -2006-2008 서울사이버대학교 외래교수 -2001-2005 여성가족부 양성평등교수 -2003-2005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종교분과 상임위원 -1999-2007 성결대학교 한국학부 겸임교수 -2002-2005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 -2004.9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한문학과 졸업(문학박사) -1998.2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 저서 -동양에도 신은 있는가(2002) -한국전통사상의 탐구와 전망(2004) -갈등과 공존(2007) -유학과 사회생물학(2017) -식물처럼 살기(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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